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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책

민란 쿤델라 ー 웃음과 망각의 책

by c5_hirayama 2021. 4. 17.

 

269 보카치오는 아무도 이해 못 할거야.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건 타자와 자신을 뒤섞고 동일시하는 것이니까.

 

 

천사들이 학생의 침실 위를 날다.

 

275

학생은 희열에 찬 절망을 느꼈다. 그는 광적으로 그녀와 정사를 나누고 싶으면서 동시에 기뻐서 울고 싶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크리스틴처럼 그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죽도록 그를 사랑했고, 그와 정사를 나누는 걸 두려워 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와 정사를 나누면 다시는 그 없이 살 수 없을 것이고, 그래서 슬픔과 욕망에 사로잡혀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행복했다. 이런 걸 받을 만한 어떤 행동도 한 적이 없는데 갑자기, 느닷없이 늘 갈구해 오던 무한한 사랑, 온 대양과 온 대륙을 합친 지구 전체도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이 무한한 사랑에 도달했기에 미칠 듯이 행복했다.

"당신을 이해해! 나도 당신과 같이 죽을 거야!"

 

 

280

리토스트 이론을 위한 새로운 고찰

 

학생의 삶에서 끄집어낸 두 실례를 통해 나는 자신의 리토스트를 마주하는 인간의 초보적인 반응 두 가지를 설명했다. 우리를 마주한 상대가 우리보다 약하다면 우리는 그에게 고통을 줄 핑계를 찾아낸다. 대학생이 너무 빨리 수영을 한 여학생에게 고통을 줬듯이.

 

우리 상대가 강하다면 우리는 간접적인 따귀나 자살을 통해 살해 같은 우회적인 복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이는 선생이 미칠 지경이 되어 아이를 창문 밖으로 집어던질 때까지 바이올린을 틀리게 연주한다. 아이는 떨어지지만 떨어지는 동안 고약한 선생이 살인죄를 쓰리라는 생각에 기뻐한다.

 

이것은 고전적인 두 방식이다. 첫 번째 방법이 연인과 부부의 삶에서 흔히 보이는 것이라면 인류의 대역사가 두 번째 방식의 수많은 실례를 보여 준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스승들이 영웅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모든 것들은 한낱 내가 아이와 바이올린 선생 일화를 통해 예시한 이 리토스트의 형태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페르시아 인들은 펠로폰네소스를 정복했고, 스파르타인들은 군사적 실수를 거듭했다. 정확하게 연주하기를 거부하는 아이처럼 그들은 분노의 눈물에 눈이 멀어 모든 이성적인 행동을 거부했다. 그들은 더 잘 싸울 수도 없었고 달아나서 목숨을 구할 수도 없었다. 그들 스스로 마지막 한 사람까지 죽게 만든 건 리토스트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리토스트라는 개념이 보헤이마에서 생겨난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체코인들의 역사, 강한 자들에 맞서는 항구적인 반항의 역서, 역사의 흐름을 흔들어 놓고 그것을 시작한 민족까지도 패배로 몰고 간 영광스러운 패배의 연속은 리토스트의 역사다. 1968년 러시아 탱크 수천 대가 이 작고 경이로운 나라를 점령했을 때 나는 도시 벽에 이런 격언이 적힌 것을 보았다. 

 

우리는 타협을 원치 않는다. 승리를 원할 뿐이다!

 

그 순간에는 여러 패배의 변주들 사이에서 선택하는 수밖에 없었는데도 이 도시는 타협을 거부했고 승리를 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리토스트였다! 리토스트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신의 파멸로 복수한다. 아이는 길바닥에 떨어져 으깨졌지만 죽지 않는 그의 영혼은 영원히 기뻐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생이 문고리에 목을 매달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은 얻허게 크리스틴에게 고통을 줄 수 있을까? 그가 미처 뭔가를 상상하기도 전에 그녀는 기차에 올라탔다. 이론가들은 이런 유형의 상황을 잘 알며 우리가 리토스트의 장애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다. 학생의 리토스트는 매순간 커지는 종양 같아서 그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랐다. 복수를 할 사람이 없었기에 그는 적어도 위로를 갈망했다. 그래서 레르몬토프를 떠올렸다. 그는 괴테 때문에 기분 상하고 볼테르 떄문에 모멸당하고서 마치 탁자에 모였던 모든 시인들이 바이올린 선생들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이 그를 창문 밖으로 던지도록 그들을 자극하려는 듯이 그들 모두에게 자신의 거만을 외치며 고개를 쳐들었던 레르몬토프를 떠올렸다.

 

학생은 형제를 욕망하듯이 레르몬토프를 욕망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가락에 접힌 종이 한 장이 만져졌다. 노트에서 뜯어 낸 종이였고, 거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당신을 기다려. 사랑해. 크리스틴. 자정."

 

그는 깨달았다. 그가 입은 상의는 전날 다락방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늦게 발견된 이 메세지는 그가 이미 아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크리스틴의 몸을 놓쳤다. 리토스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빠져 나갈 구멍을 찾지 못했다.

 

 

 

293

체코 말로 카프카는 갈까마귀를 뜻하기 때문이다.

 

294

카푸카의 소설의 시간은 인류와의 연속성을 잃어버린 인류의 시간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이름도 없는 도시들에서 사는 인류의 시간이다. 그 도시들의 거리는 이름이 없거나 다른 이름을 달고 있다. 왜냐하면 이름이란 과거와의 연속성이며 과거 없는 사람들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95

스스로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거리들에는 전복된 기념물들의 망령이 떠돈다. 체코 개혁으로 전복되고, 오스트리아의 반개혁을 전복되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에 의해 정복되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전복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의 동상들도 전복되었다. 보헤미아 곳곳의 파괴도니 기념물들 자리에서는 오날날 레닌 동상이 수천 개씩 자라난다. 그 동상들은 폐허 위로 풀처럼, 슬픈 망각의 꽃처럼 자라난다.

 

297

앞으로 일어날 일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다. 명철한 순간에 체코 민족은 자기 앞에 놓인 제 죽음의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현실로서도, 피할 길 없는 미래로서도 아니요, 아주 구체적인 가능성으로서 말이다. 체코 민족은 제 죽음과 함께 산다.

 

298

아버지는 종종 "이상하구나."라고 말했고, 아버지 눈에는 모든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데 대한 커다란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사물들은 제 이름을 잃어 버렸고 분화되지 않은 유일한 존재 속에 뒤섞였다. 그나마 아버지에게 말을 걸어 그 말 없는 무한으로부터 이름을 가진 실체들의 잃어버린 세계를 잠깐이나마 떠오르게 할 수 있는 건 나 뿐이었다. 

 

299

이렇게 산책하는 동안 우리는 음악 얘기를 했다. 아버지가 정상적으로 말할 때 나는 질문을 거의 던지지 않았다. 뒤는게 나마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에 대해 얘기했는데,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단어를 많이 아는 사람과 모든 걸 알지만 단어 한 마디도 알지 못하는 사람과의 기이한 대화였다.

 

304

사랑이란 끊임없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사랑에 대해 이보다 나은 정의를 알지 못한다.

 

305

청년은 그녀 눈을 바라보았고, 그녀 말에 귀를 기울이더니 그녀가 기억한다고 말하는 것이 사실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에 매료되어 그녀는 망각하는 자신을 본다. 

티미나는 고갯짓으로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청년이 말을 이었다. 그녀가 과거로 던지는 슬픈 눈길은 더 이상은 죽은 사람에게 보내는 충절의 표현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그녀 시야에서 사라졌고 그녀는 허공만을 볼 뿐이다.

허공이라고? 그렇다면 그녀 눈길을 그토록 무겁게 만드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추억 때문에 무거운 것이 아니라 회환으로 무거운 것이라고 청년은 설명했다. 타미나는 잊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309

우리가 사랑한 존재를 놓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든 일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던 베토벤이 원숙기에 이르러 가장 좋아한 형식이 변주였다느 것, 그 16박자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내면 세계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321

죽음은 이중양상을 띤다. 죽음은 비존재다. 하지만 존재이기도 하다. 시체라는 끔찍하게 물질적인 존재.

타미나가 아주 어렸을 때 그녀에게 첫 번째 형태로만 보여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더구나 아주 모호한)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데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은 세월과 더불어 작아져서 거의 사라졌다. (언젠가 더 이상 하늘과 나무들을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이 그녀를 공포에 질리게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면에 그녀는 점점 더 다른 측면을, 죽음의 물질적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시체가 된다는 생각에 질겁했다.

시체가 된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능욕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줍음과 알몸과 사생활의 성스러움으로 보호받언 인간 존재였는데, 죽음의 순간이 오면 우리 몸은 갑자기 아무나 처분하도록, 옷을 벗기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살피고, 악취 앞에서 코를 막고, 냉동고나 불 속에 집어넣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22

비존재처럼 감미롭게 푸르스름한 죽음이다. 왜냐하면 비존재는 무한한 공허며 빈 공간은 푸르다. 그리고 푸른색보다 더 아름답고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은 없다. 죽음의 시인 노발리스가 푸른색을 좋아했으며 여행을 하며 오직 푸른색만을 찾았던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죽음의 감미로움은 푸른 색채를 띤다.

 

328

무게없는 사물들의 세계

 

 


예전에 읽은 책인데, 지금은 못 읽을 것 같아.

너무.. 어려운데. 이런걸 진짜 나는 읽고 이해했던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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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사람.

 

나 자신을 속이며 산다.

나는 내 자신의 비루하고 찌질하고 한심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산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남들은 그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다.

 

고고하고 고매하고 고상하게-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다.

 

 

그런 자신을 꺼리낌없이 드러내는

밀란 쿤데라가 나는 부럽다.

소설은 픽션이지만

그 바탕에는 작가의 소견과 경험 따위가 내제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소설은

작가의 생각 혹은 경험과 같다, 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이 좋다.

소설은 픽션이란 허위아래

인간의 치졸하고 때묻고 비루한 모습을 나타내니까.

 

적어도 이러고 사는게 나 뿐만이 아니라는 것은

위로 아닌 위로가 된다.

나보다 낫거나 못한 인간이 아니라

나와 같은 생각과 생활 따위를 하고 있는 인물이 등장할 때,

그럴 때-

 

내가 가리는 책은, 맞다, 이런 책이다.

혹은 내가 알고 싶은 세계를 그리는 책.

 

좋다.

이런 좋은 책들이 많고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세상에 태어나서.

행복으로 오늘은 충만하다.